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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미안하다는 말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0. 2. 10.

‘미안해’라는 말은 가족처럼 매일 봐야 한다거나 아주 친하다고 느끼는 친구나 이웃 사이라면 오히려 별 의미없는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설령 미안하다는 말을 공수표 날리듯 마구해댄다 하더라도, 그 말은 100% 듣는 사람의 자기 만족을 위한 말이기에, 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책임의 여지가 없는 단지 세 음절에 불과할 뿐.

상대에게서 ‘미안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그간의 나의 모든 행동을 정당화하고, 한편으로는 안도하며, 그 뒤에 이어지는 말들을 상상을 하게 된다. 단순히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부터 시작해서, ‘미안해, 다음엔 안 그럴께.’, ‘미안해, 역시 난 너없으면 안돼.’ 등등으로 나름 해석되며 이어지는 기대들... ‘그래도 지가 잘못한건 아나보네.’, ‘다음엔 조심하겠지’, ‘적어도 몇 번은 안 그러려고 노력하겠지.’, ‘설마 또 그러려구’, 등등... 그런 나름의 해석이 실망으로 바뀌면 ‘미안하다면 다야? 어차피 말뿐일꺼면서..’라는 말이 나오게마련...

하지만 상대방이 했던 ‘미안해’라는 말 뒤에 하지 못한 말은 다른 말이었을런지도 모른다. 단순히 ‘미안해,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로부터 시작해서, ‘미안해, 그치만 이번엔 니가 이해하고 그냥 넘어가 주라.’라든가. 그도 아니면 ‘미안해, 하지만 너도 다 잘한건 아니쟎아?’라든가, 어쩌면 ‘미안해, 하지만 치사하게 그깟 일로 이렇게 까지 할건 없쟎아?’일지도...

그래서 ‘미안해’라는 말은 별 의미가 없는 말이다. ‘미안해’라는 말이 정확한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그 뒷 말이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말하는 사람은 의식적으로 뒷 말을 하지 않고, 듣는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뒷 말을 묻지 않고 작위적으로 해석하며 자기 세계 속에서 행복해한다. 사랑이나 우정따위를 이유로 ‘미안해’의 뒷 말을 내 나름대로 해석해놓고,이후 상대에게 책임을 묻는 것도 다소 우스운 짓인 듯 싶었다.
이후에 책임을 묻고 싶다면, 지금 깐깐하게 ‘미안해’의 뒷 말을 물어야 겠지? 날 믿어달라고 왜 날 못 믿느냐고 내가 너에게 이것밖에 안되는 사람이었냐는 소릴 듣더라도, 이제 제발 그만 좀 하자는 말을 듣더라도, 너 원래 이런 얘였냐는 소릴 듣더라도, 지독하다는 소릴 듣는 한이 있더라도,....

‘미안해’의 뒷말을 묻지 않을 것인지 물을 것인지의 여부는 무엇에 달려있는 것일까? 성격의 차이? 아님 상대에 대한 사랑의 양? 작위적 해석의 책임에 대한 스스로의 의지의 양? 현재 행복하고 싶은 환상의 양? 무지해서 얻는 용기의 양? 글쎄... 아주 많은 것들이 상황마다 다르게 작용하겠지만, ‘그냥’이라거나 ‘그런걸 어떻게’의 상황만 아니었음싶다.

미안하다는 말이 별 의미를 갖지 못하는 상황이더라도, 그와 내가 서로 동상이몽에 빠질 것을 알더라도, 때론 미안하다고 말해야겠지? 일부러 뒷 말을 묻지 않고서, 눈에서 입으로 그리고 얼굴 전체로 부드러워져가는 상대의 표정을 보노라면... 나 역시 상대가 묻기 전에 뒷 말을 먼저하는 그런 짓은 하지 말아야 겠지. 그냥 의미없는 말 ‘미안해’로만 족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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