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에 난 사랑을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 사람이 자기 자신 이외에 타인을 사랑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았을 때, 결론은 ‘아니오’였다. 그래서 난 사랑이라는 감정따윈 믿지 않았다. 그것은 단지 종족 번식의 본능, 어린 시절에 대한 대리 만족, 호르몬의 작용, 외로움이나 불안함을 채우기 위한 불안정한 감정들이 만들어 내는 순간적이고 강렬한 일종의 자기 착각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내가 누군가를 맘에 들어했다하더라도 그 감정을 믿지 않았고, 남이 나에게 그런 말을 하더라도 그 말 역시 믿을 수 없었다.
지금의 남편이 결혼을 앞두고 나에게 글로는 표현할 수 없는 눈빛으로 사랑한다고 말할 때마다 참 막막했었다. 날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난 사랑같은 건 믿지 않는 사람이야’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 사람이 날 선택했다는 이유가 내가 그 사람에게 잔인해도 되는 이유가 되는건 아니기에. 그렇다고 나 역시 ‘나도 사랑해’라고 말한다 해도, 그게 내가 바라보는 저 눈빛과 다를 것은 너무나도 명백한 일. 참 그땐 사랑한다는 말을 들을 때 마다 머리 한편에서 물음표가 막 떠오르면서, 조금은 설레고, 대체로 갑갑했던 생각이 난다.
그러나 그 놈의 사랑문제는 아이가 태어나고서 더 심각해졌다. 내가 사랑을 믿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자라나는 아이에게까지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도 안하고 키울 수는 없지 않은가 말이다. 더더군다나 옆에는 아이를 향해 끊임없이 사랑한다고 외쳐대는 남편이 있었다. 남편은 아이에게 ‘넌 똥도 예쁘다’, ‘넌 떼부리는 것도 귀엽다’, ‘넌 어쩜 뭘해도 그렇게 사랑스럽냐’등등... 도저히 내 머리로는 상상할 수 없는 말들을 아이에게 퍼부어대고 있었다. 그 말 속에서 아이가 너무나 안정된 모습으로 크는 것을 보면서, 나 역시 그동안 믿지 못했던 사랑이라는 녀석에 대해 재고할 필요가 생겼다.
사랑을 믿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시절에 내가 꿈꾸던 사랑은 ‘영원한 사랑’이였던 것 같다. 내가 나를 사랑하듯이 영원히 날 사랑해줄 그런 사랑. 나도 타인을 향해 그럴 사람은 못되기에 나의 사랑도 믿지 못하고, 타인의 사랑역시 매번 ‘거봐. 그러다 말거면서.’라는 식이 아니었나 싶다. 사랑을 믿지 않는다는 말은 그냥 나를 방어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오래된 광고에서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라는 카피가 선풍적인 인기였었다. 그때부터 영원하지 못할 걸 알면서도 영원을 꿈꾸던 사랑이라는 것이, 당연스레 변하는 것으로 인정되기 시작했다. 그렇지. 변하는 거지. ‘사랑도 변할수 있다는 것만 잊지 않으면 되지, 굳이 사랑자체를 부정할 필요는 없다’라는게 막바지에 내놓은 사랑과 나의 타협점이다.
사람이 사람들과 살아가면서 꼭 지켜졌음 싶거나 영원하기를 바라는 것들. 예를 들면 사랑, 행복, 믿음, 신의, 정의, 예의, 정 뭐 그밖에 기타등등... 우리가 영원히 지켜지길 바라는 것들은, 그것을 바래는 욕구가 강할수록 이와 반비례하게 지켜지기 어렵다는 것을 더 잘 알고 있는 경우일 때가 많다. 특히나 사람이 사람 관계 속에서 만들어 낸 추상적인 것들은 사람처럼 생명을 갖고 있다. 사람처럼 태어나서 자라고 소멸하기도 하고, 세상에 흐름에 맞춰 사람의 모습과 함께 변화한다.
요즘은 사랑의 모습도 다양해져서 ‘내가 좋아하는 것’, 혹은 ‘내가 감정적으로 미쳐있는 사람이 있는 시간’ 뭐 그런 모습인 것같다.
세상이 다양해지듯이 예전에는 사람과 돈에 쏠리던 사랑이 이제는 그 모습도 다양하다. 개인의 취향에 따라 타인이 아닌 내 인생을 사랑하여 하고자하는 일들. 그 일속에 채워지는 물건들. 그것들이 사랑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 일들도 대상들도 참 많고 다양하고 빠르게 변해간다.
사람에 대한 사랑역시 이제 사랑의 영원함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히려 있다면 스토커지 싶다. 세상이 빠르게 변화하듯이 사랑도 빨리 태어나고 빨리 소멸한다. 마음이 변할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할수록 몸에 대한 욕구는 더 커지고, 원나잇도 그 순간만은 진실된 사랑이었다고 인정하는 세상이고, 연애나 뭐 등등의 감정적인 긴장감은 단지 섹스로 가기 위한 탐색전을 메우는 것에 불과한 듯도 하다. 사랑은 단지 내가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없는 감정 상태에 나를 던져넣는 그 순간일 뿐이다. 참 어렵다.
나이를 먹으면 사랑이란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뒤늦게 이게 뭐람?
“‘세상에 모든 것은 변한다’라는 말만 빼고는 세상 모든 것은 다 변한다.”라는 말은 오래전부터 들어왔었다. 그땐 그냥 아무 느낌없이 그러려니 했다. 내가 느낌이 없었던 것은 ‘변한다’라는 말이었나보다. 그것이 ‘세상 모든 것’까지 임을 인정하기에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그 순간... 나는 왜 이럴까? 한때 뿌리 깊은 나무를 꿈꿨던 내 자신이 갑자기 개구리밥처럼 느껴지는 건 왜일까? 난 아직도 영원을 꿈꾸는가? 아니면 계속 꿈꾸고 싶은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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