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시절에 나는 공공연히 '나는 자존심빼면 시체'라고 내입으로 말하고 다녔다. 쓸데없는 자존심에 트러블도 많이 일으키고, 손해를 볼 때도 있었다. 상관없었다. 난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했고,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난 자존심보다는 자격지심에 꽁꽁 둘러싸여 있었던 것 같다. 나의 약점을 들키지 않을까 싶어, 더 강한 척하고 허세부리고, 다른 방법을 찾아볼 생각은 하지도 않은채 무조건 악다구니부리며 어떻게든 지지 않으려고만 했다. 이기는게 내 자존심을 지키는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같다.
직장을 다닐때는 동료선생님들과 잘 지냈었다. 하지만 그건 내가 실력이 부족해서 필요한걸 얻어야 하니까, 사회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을 배우는 것이 최우선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적당히 요령껏 굴면, 이미 사회생활 선배인 그이들도 굳이 내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았다.
어느 순간인가 내가 사회적으로 능력이 좋아졌을 때. 굳이 자존심따위를 생각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이 내 자존심을 채워주었다. 나에게 배우려고 들었고, 나에게 잘 보이려고 들었고, 나도 타인에게 어느정도 인정받게되자 소소한 일에는 상처받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 떠나자, 내 자존심도 어디론가 사라졌다. 어쩌면 그 시절에 내가 자존심이라고 생각했던 것의 정체는 '자만심'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아주 후에야 들었다.
현실을 둘러 보았을 때, 자존심은 무너지지 않았지만, 자만심이었을 때에 비해 양이 너무 작아져 있었다. 내 성격이 직업에 있어서 어떠한 장점과 단점으로 작용할지는 알수 있었지만, 내 능력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막막했다. 여전히 나는 일을 잘하는 선생이었지만, 실은 일을 하는 척만하며 습관처럼 같은 일을 반복할 뿐이었다.
이십대는 자격지심, 자존심, 자만심을 구별하지 못했다. 지금은 자격지심에 있던 양을 자존심쪽으로 끌어내려 애쓰고는 있지만, 자칫 자만심쪽으로 흘러가기도 한다. 적당한 자만심이나 허영심은 인간의 자존심을 유지하는데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그 양을 가늠하고 조절하는 것은 지금도 쉽지 않다. 요즘 어떤 책에서는 인간의 자존심이나, 자존감, 혹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툭툭 던져놓는다. 그게 그거 같은 것이, 경계도 애매한 것이... 어렵다.
그래서 생각끝에 마흔의 내가 생각해낸 '자존심'이란
'자기 자신의 존재와 행동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할 때만이 내게 존재할수 있는 것.'
현재 내 모습에 대한 타인의 평가 여부나 스스로의 만족감과, '자존심'은 다른 얘기인 듯 하다. 타인과의 상호작용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평가에 길들여지거나 한없이 자괴감에 빠져있지 않고, 스스로에 대해 생각하는 그 순간. 그 순간에 존재하는 것이 '나의 자존심'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선택한 행동에 물론 영향을 받겠지만, 더 나아졌다라거나, 더 못해졌다라거나, 잘했다거나 못했다거나 하는 식의 결과와는 다르게, 그 결과가 어떤 것이든 상관없이, 나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순간. 자존심이라는 것은 그 순간에만 올곳이 내게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존심은 고고하거나 높은 곳에 존재하는 난공불락의 성이 아닌것 같다. 나의 위치와 상관없이, 나의 모양새와 상관없이, 상처받고 흔들리고 고민하고 깨어지는 순간에 내가 가질 수 있게 되는 '나의 존재에 대한 감각'이 아닌가 싶다. 말 그대로 자.존.심.
마흔살의 나. 요즘은 세월이 빨리간다. 이렇게 살다보면 어느 순간에 지금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도 또 잊어버리겠지. 그리고 오십이되고, 육십이 되면, 어찌 달라지려나??
'난 이미 세상을 다 알아. 세상에 내가 더이상 기대할 것은 없어' 라고 생각하며 살았던 이십대때보다, 마흔살을 요즘은 오히려 더 세상도 사람도 더 모르겠다. 하지만 세상을 다 안다고 생각했을 때보다, 세상을 모르겠는 지금이 오히려 덜 막막한걸 왜 일까? 나이가 견디고 기다릴줄 아는 힘을 준걸까?
어쨌든 마흔살의 요즘 나는 아직도 이러구 산다. 아마 평생 이러구 살거 같다. ㅋㅋ
직장을 다닐때는 동료선생님들과 잘 지냈었다. 하지만 그건 내가 실력이 부족해서 필요한걸 얻어야 하니까, 사회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을 배우는 것이 최우선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적당히 요령껏 굴면, 이미 사회생활 선배인 그이들도 굳이 내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았다.
어느 순간인가 내가 사회적으로 능력이 좋아졌을 때. 굳이 자존심따위를 생각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이 내 자존심을 채워주었다. 나에게 배우려고 들었고, 나에게 잘 보이려고 들었고, 나도 타인에게 어느정도 인정받게되자 소소한 일에는 상처받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 떠나자, 내 자존심도 어디론가 사라졌다. 어쩌면 그 시절에 내가 자존심이라고 생각했던 것의 정체는 '자만심'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아주 후에야 들었다.
현실을 둘러 보았을 때, 자존심은 무너지지 않았지만, 자만심이었을 때에 비해 양이 너무 작아져 있었다. 내 성격이 직업에 있어서 어떠한 장점과 단점으로 작용할지는 알수 있었지만, 내 능력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막막했다. 여전히 나는 일을 잘하는 선생이었지만, 실은 일을 하는 척만하며 습관처럼 같은 일을 반복할 뿐이었다.
이십대는 자격지심, 자존심, 자만심을 구별하지 못했다. 지금은 자격지심에 있던 양을 자존심쪽으로 끌어내려 애쓰고는 있지만, 자칫 자만심쪽으로 흘러가기도 한다. 적당한 자만심이나 허영심은 인간의 자존심을 유지하는데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그 양을 가늠하고 조절하는 것은 지금도 쉽지 않다. 요즘 어떤 책에서는 인간의 자존심이나, 자존감, 혹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툭툭 던져놓는다. 그게 그거 같은 것이, 경계도 애매한 것이... 어렵다.
그래서 생각끝에 마흔의 내가 생각해낸 '자존심'이란
'자기 자신의 존재와 행동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할 때만이 내게 존재할수 있는 것.'
현재 내 모습에 대한 타인의 평가 여부나 스스로의 만족감과, '자존심'은 다른 얘기인 듯 하다. 타인과의 상호작용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평가에 길들여지거나 한없이 자괴감에 빠져있지 않고, 스스로에 대해 생각하는 그 순간. 그 순간에 존재하는 것이 '나의 자존심'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선택한 행동에 물론 영향을 받겠지만, 더 나아졌다라거나, 더 못해졌다라거나, 잘했다거나 못했다거나 하는 식의 결과와는 다르게, 그 결과가 어떤 것이든 상관없이, 나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순간. 자존심이라는 것은 그 순간에만 올곳이 내게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존심은 고고하거나 높은 곳에 존재하는 난공불락의 성이 아닌것 같다. 나의 위치와 상관없이, 나의 모양새와 상관없이, 상처받고 흔들리고 고민하고 깨어지는 순간에 내가 가질 수 있게 되는 '나의 존재에 대한 감각'이 아닌가 싶다. 말 그대로 자.존.심.
마흔살의 나. 요즘은 세월이 빨리간다. 이렇게 살다보면 어느 순간에 지금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도 또 잊어버리겠지. 그리고 오십이되고, 육십이 되면, 어찌 달라지려나??
'난 이미 세상을 다 알아. 세상에 내가 더이상 기대할 것은 없어' 라고 생각하며 살았던 이십대때보다, 마흔살을 요즘은 오히려 더 세상도 사람도 더 모르겠다. 하지만 세상을 다 안다고 생각했을 때보다, 세상을 모르겠는 지금이 오히려 덜 막막한걸 왜 일까? 나이가 견디고 기다릴줄 아는 힘을 준걸까?
어쨌든 마흔살의 요즘 나는 아직도 이러구 산다. 아마 평생 이러구 살거 같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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